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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샹송가수 전마리와 그녀의 남편 이주원 그리고 양희은
작성자 싸인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23-09-13 12: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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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5

75 내님의 사랑은 ~~ 국내 가요를

         불어로 번안해 부른 샹송 가수

{이번편은 샹송 마지막 편으로 특이하게도 국내가요들을 샹송으로 번안해 부른 샹송가수 전마리와 그녀의 남편 이주원 그리고 그들과 연동되어 있는 양희은을 소개합니다.}

 샹송으로 듣는 우리의 포크송- 전마리(Marie Jeon)의 샹송 음악여행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해 보지 않은 감수성 예민하던 어린 시절,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8년 음악에 심취해 있던 한 학생 이주원(1951~2009)은 꼭 있을 법한 잃어버린 사랑 얘기를 세밀하게 또 아련하게 수채화처럼 아래 노래를 작사 작곡한다.

https://youtu.be/5D7HJNz65Wk

  내 님의 사랑은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 간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언덕 저편 아지랑이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 간다

푸른 물결 흰 파도 

붉게 물든 저녁 노을 

사랑하는 그대여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 우 우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 간다

가을바람에 떨어진 

비에 젖은 작은 낙엽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 간다 새하얀 눈길 위로 남겨지는 발자욱들 사랑스런 그대여 

내 품에 돌아 오라 그대 

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 우 우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이주원은 이 노래를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노래가 아닌 교회 다닐때 만났던 여학생이 있었고 짝사랑의 대상으로 인해 경험한 외로운 정서를 그려낸 노래였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끼 많고 조숙한 이 학생은 이미 고교 1학년 때인 1967년 

밴드Black Stone을 결성해 실력을 쌓고 졸업을 하면서 미8군 무대 등에서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맡아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 통기타 가수로 변신하게 된다.

1970년에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음악에 뛰어난 엘리트 대학생들이 활동하던 젊은이들의 문화 공간 YWCA의 <청개구리 집>(직원 식당을 개조한공간)이 있어서, 1971년에 이주원이 여기에서 이들과 만나면서 포크 송을함께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과 계속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 동년배들보다 3년 늦게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엘리트들이 탑승하는 열차에 확실하게 몸을싣고 자신의 색깔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아래 양희은 얘기는 Mary Hamilton 노래를 '아름다운 것들'로 번안해 부른 곡을 소개했던 13편과 일부 내용이 중복됨)

한편 양희은은 집안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지내던 시절인 1970년, 대학에 다니는 경기여고 동창과 <청개구리 집>에 같이 놀러 갔다가, 같이 간 친구가 몰래 전해준 쪽지를 보고서는 사회자가 '여기 학교 다닐 때 노래 제일 잘했다는 양희은 씨, 와 계시지요?' 하면서 부르자 잠시 당황하던 양희은은 이왕 벌어진 판에 무대에 올라 팝송을 부르게 되어 사실상 가수가 탄생하게 된다. 

이 때 양희은(1952년 서울출생, 서강대 사학과)은 재동초등학교 동창이던 김민기(1951년 익산출생, 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다시 새로운 인연으로만나게 되고 이듬해 양희은이 대학생이 된 후 김민기의 노래를 받아 1971년데뷔앨범 '아침 이슬'을 발표해 풋풋한 모습으로 첫 번째 꽃을 피운다.

https://youtu.be/wkuPRQn-fjg

그런데 서슬이 시퍼런 박정희 무신정권하에서 김민기가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며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피는 아이들' 등을 부르다 경찰에 연행된다. 

연이어서 김민기의 앨범과 노래가 모두 방송금지 조치당하면서 양희은은 음악 동지들을 잃고 한동안 활동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늦게 대학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년배의 재주 많은 이주원과 콤비를 이뤄 1974~1976년까지 이주원이 창작한 곡 '네 꿈을 펼쳐라', ‘한사람',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양희은 작사) 노래들이 양희은에게 전달된다. 멜로디는 물론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반영이면서도 따끈한 가사로 점철된 주옥같은 포크송들을 양희은이 불렀고, 또 불렀다 하면 어김없이 히트로 이어졌다. 

이로서 양희은은 두 번째 꽃망울로 더 크게 터뜨리게 되고 이주원은 양희은의 입을 통해 이름을 드높이게 되면서 둘은 새로운시대 우리나라 청년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https://youtu.be/Pf8my0iSEbI

이렇게 해서 큰 물결이 한번 지나가고 이주원은 1979년 강인원, 전인권, 나동민과 함께 서로 따로따로 음악활동을 하다가 또 같이 모여서 음악활동을 한다는 그룹 〈따로 또 같이〉라는 포크 그룹을 결성해 그룹을 리드하며 '맴도는 얼굴', '잠 못 이루는 이 밤을', '조용히 들어요' 등을 발표한다.

끼 많고 튀는 사람들이 서로의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향기도 다른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다가 같이 어우러져 서정적이고 깊이 있는 음악활동을 하며 1988년에는 4집을 발표했다.

https://youtu.be/N8n-qnbeTjE

'따로 또 같이'는 멤버들이 1집 발표 후 변동이 있었으나 당시로서는 실험정신이 강렬한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했고 한국 라이브 콘서트의 공연문화를 열기도 했는데 이주원이 18살에 작사 작곡한 '내 님의 사랑은' 노래는 1985년3집에 실었다. 

이렇게 활동하던 멤버의 나동민은 노찾사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가 미국으로 이민가고, 전인권은 록그룹 들국화를 결성해 활동하고, 강인원은 솔로로 독립하며 흩어지게 된다.

●이제부터는 본 주제 우리의 포크송을 샹송으로 번안해 부른 전마리와의 얘기를 시작한다.

한편 이주원은 인천대학 통기타 동아리 Folkline이 태동할 때 전문음악인으로서 작사하는 법, 곡을 쓰는 법, 노래하고 연주하는 법을 지도하며 뒤를 돌봐 주었다. 

이 Folkline 1기 전태형의 누나가 1985년부터 프랑스문화원 샹송 클럽에서 샹송을 가르치던 전마리 (본명 전미자로 1958년생 상명여대 불문과 졸업, 1981년 뮤지컬 배우로 사회생활 시작)였고 이들은 Folkline을 서로 도와 주며 같이 만나게 된다. 

실력 있고 준수한 외모에 마음까지따뜻한 왕자 이주원과, 얼굴 윤곽이 또렷하고 특히 아름다운 눈망울에 몸매까지 잘 빠져 인형처럼 똑 부러지게 예쁜 공주 전마리는 부부가 된다.

이들 부부는 1987년 인천 제물포에서 카페 <혼비여비>(혼자 내리는 비 여럿이 내리는 비)를 함께 운영하며 이주원은 포크송을 전마리는 샹송을 불렀다. 그 후 〈혼비여비>는 부평으로 자리를 옮겨 한동안 더 운영을 한다.

한편으로 이들 부부는 2년 동안 특별하고도 위대한 작업을 했다. 서로의 장점을 승화시켜 전마리는 남편이 만든 노래들과 국내 가요들의 아름답고 시적인 가사의 원 뜻을 손상시키지 않게 정서가 다른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이주원은 샹송의 뉘앙스, 음의 장단, 연음을 최대한 살리며 편곡을 해 국내 첫 샹송음반을 발표한다.

1990년 1집 타이틀 

Chanson D'Automne (가을노래)을

-수록곡을 한글로 적으면 한사람, 너와 내가 함께, 내 님의 사랑은, 네 꿈을 펼쳐라,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는, 하늘나라, 들길 따라서, 모두 모여 노래를.

https://youtu.be/vK7PWj__kng

1991년에 2집 타이틀 

<Lettre D'Automne (가을편지)>을---수록곡을 한글로 적으면 

나뭇잎 사이로, 가을편지, 나는 여기에, 가난한 연인들,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바람은 강물을 만났을까, 당신은 백조, 크리스마스 이른 저녁.

연이어 발표한다. 특히나 가을에 어울리는 곡들로 음반을 채웠는데 전마리의 완벽한 French 목소리로 달콤한 샹송의 낭만이 짙게 배어나게 노래를 선물해 주어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느리게 즐기는 Slow folk를 팬들에게 선사하면서 우리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당시 주부가수 전마리가 국내가요 샹송으로 부른 가요가 서울신문사에서 발간한 월간지 Queen 1990년 10월호에 소개되어 있다는 것을 2019년에 알았고, 다행히 중고서적 판매 사이트 북코아에 한 권이 올라와 있어 바로 구입했고아래에 소개한다.

그 후 전마리는 방송음악 영화음악 작곡가로 이주원도 후배 지도 등 음악관련 활동을 했다. 사랑의 썰물을 부른 임지훈(1959년생)이 진행하던 LIVING tv   <예전처럼> 프로에 출연해

임지훈의 유도 질문으로 두사람 남다른 부부애를 얘기했고 에디뜨 삐아프의

"빠담빠담"(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의성어) '내 님의 사랑은' '가난한 연인들'을  들려줬다.

https://youtu.be/kMkn6_5MsOA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이주원이 전립선 관련 질병과 우울증을 앓아 부부는 강화도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친화적으로 생활했다.

한편 민들레교회 (경기도 부천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많은 복음성가를 작곡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2009년 자택에서 그만 58살의 이른 나이에 아들 준희와 귀부인을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생전의 이주원은 아내를 통해 자양분을 섭취했다고 얘기했듯이 이들의 따끈한

부부관계를 누가 시샘을 해 그를 일찍 데려 갔는고. 

샹송 終

http://www.blacktige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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